체중계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요.
석 달째였거든요. 주사는 한 번도 안 거르고, 단계도 시키는 대로 올렸어요. 그런데 숫자는 처음 잰 날에서 1kg 남짓 내려간 게 전부였어요. 발끝에 힘을 줬다가 빼봐도 똑같았고요. 아침마다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게 작은 시험처럼 느껴졌어요. 매번 같은 점수를 받는 시험이요.
그 무렵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문장이 하나 있었어요. "12주에 5%도 안 빠지면 그 약은 나한테 안 듣는 거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르겠는데, 한번 박히니까 잘 안 빠지더라고요. 같이 시작한 지인은 벌써 옷이 두 치수나 줄었다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았어요. 후기들을 찾아보면 한 달에 몇 kg씩 빠졌다는 얘기뿐이라, 비교는 자꾸 나만 못나 보이는 쪽으로 흘러갔고요.
그래서 끊을 생각을 진지하게 했어요. 비급여라 매달 나가는 돈도 적지 않았고요. 그러다 우연히 임상시험 사후분석 하나를 읽게 됐는데, 거기서 처음 알았어요. 나처럼 늦게 시작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고, 그 사람들 대부분이 계속 맞았을 때 결국 빠지더라는 걸요. 물론 끝내 안 빠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숫자를 다 보고 나서야 체중계 앞에서 덜 흔들리게 됐어요. 그날의 나한테 누가 이 숫자들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그 마음으로 하나씩 적어요. 겁주려는 것도, 약을 권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12주에 5%'는 누가 정한 선일까
먼저 그 12주 선부터 짚을게요. 이게 어디서 온 기준인지 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거든요.
12주에 5%라는 숫자는 사실 '치료가 실패했다'는 의학적 정의는 아니라고 해요. 일부 보험이나 의료제도에서 비용 지원을 계속할지 판단하는 행정적 기준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내 몸이 약에 반응하느냐"를 재는 잣대라기보다, "돈을 더 댈 만한가"를 재는 잣대인 경우가 많다고 해요. 둘은 꽤 다른 질문이잖아요.
물론 이런 기준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약값이 비싼 만큼 어느 시점엔 효과를 점검할 잣대가 필요하긴 하니까요. 문제는 그 잣대를 사형선고처럼 받아들일 때예요. 그러면 정작 몸이 뒤늦게 반응할 시간을 스스로 끊어버리게 돼요. 제가 딱 그럴 뻔했고요.
여기서 많이 헷갈려요. 그 선을 못 넘었어도 약은 몸 안에서 여전히 뭔가 하고 있을 수 있어요. 정해둔 시점에 정해둔 숫자에 아직 못 닿았다는 것뿐이거든요.
12주 5%는 '실패 판정'보다는 비용을 둘러싼 행정 기준에 가깝다고 해요. 내 몸이 약에 반응하는지를 직접 재는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져요.
'늦게 반응하는 사람'이 진짜 따로 있더라고요
제 마음을 가장 크게 돌려놓은 건 SURMOUNT-1이라는 시험의 사후분석이었어요. 티르제파타이드(마운자로 성분)를 맞은 사람들을 두 갈래로 나눠본 자료였어요.
12주 시점에 체중이 5% 넘게 빠진 사람을 '빠른 반응자', 5%에 못 미친 사람을 '늦은 반응자'라고 불렀는데요. '늦은 반응자'는 그냥 초반에 느리게 출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 12주 시점 분류 | 인원 | 비율 |
|---|---|---|
| 빠른 반응자 (5% 이상) | 1267명 | 82.0% |
| 늦은 반응자 (5% 미만) | 278명 | 18.0% |
전체의 18%, 그러니까 다섯 명 중 한 명꼴이 12주에 5%를 못 넘긴 거예요. 적은 숫자가 아니죠. 저만 유난히 굼뜬 게 아니었어요. 이 한 줄을 읽는 순간, 어딘가 외딴섬에 혼자 떨어진 느낌이 조금 가셨어요.
눈에 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어요. 늦은 반응자 쪽에 남성 비율이 더 높았어요. 늦은 반응자는 45%가 남성이었는데, 빠른 반응자는 30%였거든요. 성별 하나로 결과가 갈린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고요. 그래도 초반이 더딘 건 약이 고장 났다기보다 사람마다 다른 정상적인 편차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것만으로도 저한테는 충분히 위안이 됐어요.
늦게 출발한 사람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요
그럼 이 278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끊었으면 거기서 이야기가 끝났을 텐데, 계속 맞은 사람들을 따라가 봤더니 체중이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 시점 | 5% 이상 빠진 사람 | 비율 |
|---|---|---|
| 24주 | 194명 | 70% |
| 72주 | 250명 | 90% |
24주, 그러니까 반년쯤 됐을 때 늦은 반응자의 70%가 5% 선을 넘었어요. 시작점에선 278명 모두 5%에 못 미쳤는데, 반년 사이에 194명이 그 선을 넘긴 거예요. 72주까지 계속 맞은 사람은 90%, 그러니까 250명이 그 선을 넘었고요. 12주에 멈춰 서서 "난 안 되나 봐" 했다면 못 봤을 풍경이에요.
속도도 따져봤더라고요. 늦은 반응자가 5%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이 평균 24.8주였어요. 편차가 ±12.7주라 사람마다 들쭉날쭉했지만, 평균만 봐도 12주의 두 배예요. 누군가는 더 일찍, 누군가는 훨씬 늦게 그 선에 닿았다는 뜻이고요.
늦은 반응자가 5%에 닿기까지 평균 24.8주가 걸렸어요. 12주에 멈춰 판단하면, 아직 절반밖에 안 온 사람을 너무 일찍 접게 되는 셈이에요.
저는 이 대목에서 좀 멍해졌어요. 제 석 달이 너무 이른 시점이었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안 보이던 변화가 몸 안에선 천천히 쌓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다른 약에서도 똑같은 모양이 나왔어요
여기까지만 보면 "그 시험 하나가 그랬겠지" 싶을 수 있어요. 저도 그게 걸렸거든요. 그런데 같은 패턴이 다른 약에서도 나왔어요.
이번엔 세마글루타이드(위고비·오젬픽 성분)를 본 STEP 4라는 시험이에요. 처음 20주 동안 세마글루타이드를 유지 용량까지 쓴 사람들을 무작위로 나눠, 한쪽은 계속 세마글루타이드를 맞게 하고 다른 한쪽은 가짜 주사로 바꿔서 68주까지 지켜봤어요. 그 안에서 20주에 반응이 시원찮던 사람만 따로 떼어 보면, 두 쪽의 이후 곡선이 이렇게 갈렸어요.
| 20주 비반응자, 이후 | 68주까지 평균 체중 변화 |
|---|---|
| 계속 맞은 군 | -6.4% |
| 가짜 주사로 바꾼 군 | -0.3% |
계속 맞은 쪽은 체중이 평균 6.4% 더 빠졌고, 끊은 쪽은 0.3%로 거의 제자리였어요. 초반에 더디던 사람도 계속 맞으니 뒤늦게 빠졌다는 거예요. 끊은 쪽은 그 흐름이 그냥 멈춰버렸고요.
참고로 STEP 4에서 세마글루타이드를 끝까지 유지한 사람 전체로 보면, 86.2%가 68주에 5% 이상 빠졌어요. 초반에 빠른 사람과 더딘 사람을 다 합쳐도, 끝까지 함께 간 사람 대부분이 의미 있는 감량에 닿았다는 뜻이에요.
서로 다른 두 약(티르제파타이드와 세마글루타이드), 서로 다른 두 시험에서 같은 모양이 나온 거예요. 한 군데서만 나온 우연이라기엔 그림이 너무 닮았죠. 이게 제겐 제일 든든한 대목이었어요. 약 한 종류, 시험 한 건이었다면 "그 시험만 운이 좋았겠지" 하고 넘겼을 텐데, 두 번 반복되니 얘기가 달라지더라고요.
여기서 한 가지는 구분해두고 싶어요. 이건 잘 빠지다가 어느 순간 멈추는 정체기 얘기가 아니에요. 정체기는 GLP-1 정체기 가이드에서 따로 다뤘어요. 지금 하는 얘기는 '시작부터 거의 안 움직일 때'라서 결이 좀 달라요.
그래도 데이터가 약속하지 않는 것
여기서 솔깃해서 "계속하면 다 빠지는구나" 하고 넘어가면 곤란해요. 안심이 되는 숫자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해보는 게 맞거든요.
90%는 확률이지 보장이 아니에요. 뒤집으면 늦은 반응자 열 명 중 한 명은 72주까지 맞고도 5%에 못 닿았다는 뜻이에요. 278명 중 대략 28명쯤이요. 끝내 안 빠지는 사람도 분명히 있는 거예요. "계속하면 누구나 결국 빠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 글을 '버티면 무조건 된다'는 응원가로 읽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예요. '나는 늦게 반응하는 쪽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끊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후보에 한 번은 넣어두자는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평균 감량 속도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는 GLP-1 감량 속도 얘기에 따로 적어뒀어요. 그 글을 같이 보면 '내 속도가 이상한 건가'라는 불안이 좀 더 가라앉을 거예요.
그리고 약은 혼자 일하지 않아요. 미국 FDA 라벨을 봐도 세마글루타이드는 저열량 식이와 늘어난 신체활동과 '함께' 쓰도록 돼 있어요. 약을 끼워 넣는 거지, 다른 걸 다 빼고 약만 남기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더딘 구간이라면 식사나 활동 같은 다른 축이 흔들리고 있진 않은지 같이 살펴볼 만해요. 저도 처음엔 약만 믿고 나머지는 손을 놨었거든요.
더딘 구간에 나는 뭘 점검했나
끊을지 말지를 정하기 전에, 저는 약 말고 다른 것부터 한 바퀴 둘러봤어요. 거창한 게 아니라 기본기였어요. 약이 늦게 반응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식사나 활동 같은 기본이 흔들리면 그만큼 더 더딘 것도 사실이거든요.
처음 걸린 건 단백질이었어요. 입맛이 줄다 보니 끼니가 가벼워졌는데, 그러면서 단백질부터 빠지더라고요. 빵이나 면으로 대충 때우는 날이 늘었던 거예요. 끼니마다 단백질을 먼저 채우니 포만감이 한결 오래갔어요.
움직임도요. 거창한 운동 말고 그냥 걷는 양이요. 약 맞으면 알아서 빠지겠지 싶어 오히려 덜 움직이고 있었더라고요. 출퇴근 길에 한 정거장 먼저 내리는 정도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솔직히 제일 뜨끔했던 건 잠하고 술이었어요. 며칠 푹 못 자거나 술자리가 잦은 주에는 체중계가 유독 안 움직였거든요. 이건 약 탓이 아니더라고요. 유난히 안 빠진 주를 되짚어보면 늘 잠이 부족했고, 그걸 알고 나니 약 핑계만 댈 수가 없었어요.
이런 걸 점검한다고 갑자기 잘 빠지는 건 아니에요. 다만 "약이 안 듣는다"고 단정하기 전에, 약이 일할 토대가 갖춰져 있는지부터 확인해보자는 거예요. 명령이 아니라 제 경험이고요. 뭘 바꿀지는 결국 담당 의료진과 같이 정해야 할 일이에요.
어떨 때 병원에 가져갔나
물론 마냥 기다리는 게 답은 아니에요. 늦은 반응은 가능성일 뿐이고, 실제로 거의 반응이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저는 더딘 구간이 길어지면 다음 진료 때 솔직하게 다 꺼내놨어요. 몇 주 동안 체중이 얼마나 움직였는지, 메스꺼움 같은 부작용은 어땠는지, 식사랑 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 집에서 체중계 숫자를 주마다 메모해 갔더니 대화가 훨씬 구체적이었어요. "그냥 안 빠져요"보다 "이 4주 동안 0.5kg 움직였어요"가 의료진에게도 훨씬 쓸모 있는 정보더라고요.
계속 맞을지, 단계를 더 올릴지, 다른 약으로 바꿀지는 전부 임상적인 판단이라 제가 혼자 정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건 담당 의료진이나 약사랑 같이 결정할 몫이에요. 약을 바꾸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약 갈아타기 얘기에 따로 정리돼 있는데, 그 결정도 결국 진료실에서 같이 내리는 게 맞아요.
부작용이 일상에 무리를 줄 만큼 세거나, 새로 불편한 증상이 생기면 더 미루지 않고 알렸어요. 효과가 더디다고 해서 부작용까지 참아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별개의 문제라 따로 얘기하는 게 좋았어요. 한 가지 더, 세마글루타이드(위고비)는 미국 FDA 라벨상 갑상선 수질암 개인력·가족력이 있거나 MEN 2라는 증후군이 있는 사람에겐 쓰지 않게 돼 있어요. 박스경고라고 부르는 미국 FDA 라벨의 표현이고요.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승인 범위나 제형은 이와 다를 수 있어서, 이런 부분은 처방 전에 꼭 확인받는 게 좋아요.
가격도 무시 못 했어요. GLP-1 비만 치료는 비급여라 건강보험도 실손도 안 돼서, 용량에 따라 한 달에 30만–60만원대가 나가요. 병원마다 차이가 있고요. 더딘 구간에 이 돈을 계속 댈지는 효과 기대치랑 같이 저울에 올려볼 문제예요. 다만 그 저울에 '늦은 반응 가능성'이라는 추를 빼놓진 말자는 게 제 얘기의 전부예요. 비용이 부담이라면, 그 부담을 의료진과의 상담 테이블에도 솔직히 올려두는 편이 나았어요.
곡선의 출발점에 서 있는지도 몰라요
석 달째 체중계 앞에서 끊을 생각만 하던 그날의 나한테, 지금 한마디 건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12주는 아직 중간 어디쯤일 수 있어"라고요. 그때 알았다면 매일 저울 위에서 마음 졸이던 시간이 조금은 덜 무거웠을 거예요.
SURMOUNT-1의 늦은 반응자 90%가 결국 5% 선을 넘었고, 거기까지 평균 24.8주가 걸렸어요. STEP 4에서도 20주에 더디던 사람이 계속 맞으니 68주에 -6.4%까지 갔어요. 가짜 주사로 바꾼 쪽은 -0.3%로 거의 멈춰 있었고요. 두 약, 두 시험에서 같은 모양이 나온 게 제겐 가장 큰 안심이었어요.
물론 열 명 중 한 명은 끝내 못 닿았다는 것도 같이 기억하려고 해요. 그래서 제 결론은 '버티면 무조건 된다'가 아니라, 끊기로 마음먹기 전에 늦게 반응하는 쪽일 가능성을 한 번은 떠올려보자는 거예요. 떠올려본 뒤에 끊는 것과, 떠올리지도 못한 채 12주 숫자에 떠밀려 끊는 건 전혀 다른 결정이니까요.
이 글은 공개된 임상시험과 학술 논문을 바탕으로 한 정보일 뿐이에요. 계속 맞을지, 단계를 올릴지, 끊을지는 담당 의료진과 같이 정하는 게 맞고요. 끊고 나면 빠졌던 체중이 일부 돌아오는 요요도 흔하니까, 그 결정만큼은 혼자 진료실 밖에서 내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석 달 전의 나처럼요.
출처
이 글의 사실 주장은 아래 1차 출처에 대조해 검증했습니다.
- PubMed Central (NIH)pmc.ncbi.nlm.nih.gov/articles/PMC12326891
- PubMed Central (NIH)pmc.ncbi.nlm.nih.gov/articles/PMC8265765



